2) 육입(六入)이 곧 여래장(如來藏)
또 아난아,어찌하여 육입(六入*眼耳鼻舌身意)이 여래장(如來藏)의 본 모습인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妙) 결코 변하지 않는 참다운 모습(眞如)인 본 바탕(性)이라 하는지 아느냐? 아난아,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주시하게 되면 고단 하여져서 거짓으로 만들어진 꽃(狂花)이 보이게 되는데 이 눈과 고단함이 하나 된 피로한 모습을 헤아려 살펴보는 것(見)을 보리(菩提)라 하는 것이니라. 밝음과 어둠의 두 가지 헛된 경계로 비롯하여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두 경계(境界)의 모습을 끌어당겨 취하는 것을 헤아려 살펴봄(見)의 참다운 모습(性)이라 부르거니와 이 헤아려 살펴보는 것(見)이 밝음이나 어둠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살펴보는 자리(眼根)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허공(虛空)에서 생긴 것도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왜냐하면 만일 밝음에서 왔다면 어둘 때에는 사라져야할 것이니 당연히 어둠을 보지 못할 것이고,만일 어둠에서 왔다면 밝을 때에는 사라져야할 것이니 당연히 밝음을 보지 못할 것이니라.만일 살펴보는 자리(眼根)에서 생겼다면 반드시 밝음과 어둠이 없을것이니 그렇다면 똑똑하고 분명하게 헤아려 보는 마음(見精)의 본바탕에 스스로의 참다운 모습(自性)이 없는 것이니라.만일 허공(虛空)에서 나왔다면 앞에 경계(境界)의 모습을 보았으니 되돌아가서는 당연히 살펴보는 자리(眼根)를 보아야 할 것이며 또 허공(虛空)스스로 본 것이니 어찌 너의 눈을 통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냐?
그러므로 눈으로 보는 것(眼入)이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모습이어서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 (自然)것도 아니어서 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아난아,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있어 두 손가락으로 급히 귀를 막으면 듣는 자리(耳根)가 고단하여져서 머리 가운데 소리가 만들어 지는데 이 귀와 고단함이 하나 된 피로한 모습을 헤아려 생각해 살펴보는 것(見)을 보리(菩提)라 하느니라.움직이고 고요한 두 가지 헛된 경계(境界)를 비롯하여 소리를 알아듣는 그 가운데 있으면서 두 경계(境界)모습을 끌어당겨 취하는 것을 소리를 알아듣는 참다운 모습(聞性)이라 부르거니와 이 소리를 알아들음이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경계(境界)를 떠나서는 마침내 스스로의 모양(自體)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소리를 알아들음이 움직이거나 고요함에서 오는것도 아니고 듣는 자리(耳根)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허공(虛空)에서 생긴 것도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왜냐하면 만일 고요함에서 왔다면 움직일 때는 사라져야할 것이니 당연히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 못해야하며 만일 움직임에서 왔다면 고요할 때는 당연히 고요함을 깨닫지 못하리라.만일 듣는 자리(耳根)에서 생겼다면 반드시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을것이니 그렇다면 소리를 알아듣는 모양(聞體)에 스스로의 본바탕(自性)이 없을 것이니라.
만일 허공(虛空)에서 나왔다면 소리를 알아들음으로 참다운 모습(性)이 되었으므로 허공(虛空)이 아닐 것이며 또 허공(虛空)이 스스로 소리를 알아듣는 것이니 어찌 너의 귀를 통하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글로 귀로 소리를 알아듣는 것이 거짓되어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니어서 본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있어 급히 코에 숨을 들이마신 뒤 오래되면 고단하여져서 이때에 코 중간에서 차가운이 닿아 이 닿음(觸)을 비롯하여 통하고 막힘을 닿아서 알고 비어있고 가득 차 있음을 닿아서 알 뿐만 아니라 모든 향기와 냄새를 닿아서 아나니 이 코와 고단함이 하나된 이 고단한 모습을 헤아려 살펴보는 것(見)을 보리(菩提)라 하느니라.통하고 막힌 두 가지 헛된 경계(境界)를 비롯하여 냄새를 맡고 있는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두 경계(境界)를 비롯하여 냄새를 맡고 있는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두 경계(境界)를 끌어 당겨 취하는 것을 냄새를 맡는 참다운 모습(齅性)이라 이 냄새 맡음이 통함과 막힘의 두 경계를 떠나서는 마침내 모습(自體)이 없느니라.이와 같이 냄새 맡음이 통함이나 막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냄새 맡는 자리(齅根)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허공(虛空)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왜냐하면 만일 통합에서 왔다면 막히면 냄새 맡음이 사라질 것이니 어떻게 막힘을 알 것이며 막힘을 비롯하여 왔다면 통할 적에는 냄새 맡음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향기와 냄새의 닿음을 환하게 드러내겠느냐?
왜냐하면 만일 냄새 맡는 자리(鼻根)에서 생겼다면 반드시 통함과 막힘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냄새 맡는 모양(齅體)에 스스로의 참다운 모습(自性)이 없을 것이니라.만일 허공(虛空)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냄새 맡음이 스스로 네 코를 냄새 맡아야 할 것이며 허공(虛空)이 스스로 냄새 맡는 것이니 어찌 너의 코를 통하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코로 냄새 맡는 것이 거짓되어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니어서 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아난아,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있어 혀로 입술을 핥아 열이 나고 고단하여져서 만일 그 사람이 병이 있으면 쓴 맛이 날 것이고,병이 없다면 단 맛을 느낄 것이니라.단 맛과 씀 맛이 드러남으로 보아 이 맛보는 자리(舌根)가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담담한 참다운 모습(淡性)을 지니고 있으니 혀와 고단함이 하나 된 피로한 모습을 헤아려 살펴보는 것(見)을 보리(菩提)라 하느니라. 달고 쓰며,담담한 두 가지 헛된 경계(境界)를 비롯하여 알아차린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두 경계(境界)를 끌어당겨 취하는 것을 맛을 아는 참다운 모습(味性)이 저 달고 쓰며 담담한 두 경계(境界)를 떠나서는 마침내 스스로의 모양(自體)이 없느니라.그러므로 아난아,이와 같이 쓰고 담담함을 맛보아서 아는 작용(知)이 달고 쓴 것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담담함에서 비롯함도 아니고 또 맛보는 자리(舌根)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허공(虛空)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달거나 쓴 거에서 나왔다면 담담할 때는 아는 작용(知)이 사라져야 할 것이니 어떻게 담담함을 알며 만일 담담함으로 부터 왔다면 달 때는 아는 작용(知)을 잃을 것인데 어떻게 달거나 쓴 두 맛의 모습을 알겠느냐? 만일 맛보는 자리(舌根)에서 생겼다면 반드시 달거나 담담함 내지는 쓰다는 경계(境界)가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맛을 아는 작용(知)의 본바탕에 스스로의 참다운 모습(自性)이 없으리라.그러므로 맛을 아는 작용(知)이 거짓되어 처음부터 인연(因緣)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니어서 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있어 한쪽 찬 손으로 더운 손에 닿을 적에 만일 찬 기운이 더운 기운보다 많으면 더운 손이 차가워지고 만일 더운 기운이 찬 기운 보다 많으면 찬손이 더워지느니라.이와 같이 어울려서 닿음(觸)으로 드러나 깨우치게 되고 헤어짐으로 해서 서로 기운이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며 고단한 닿음(觸)에 비롯하여 이루어지는 것과 같으니라.몸과 고단함이 하나 된 피로한 모습을 헤아려 살펴보는 것(見)을 보리(菩提)라 하느니라.나뉘고 어울리는 두 가지 거짓된 경계(境界)를 비롯하여 깨우침(覺)을 드러내어 그 가운데에 머물면서 이 경계(境界)의 모습을 끌어당겨 취하는 것을 느끼고 깨우치는 모습(知覺體)이 저 헤어짐과 어울림의 어기는 것과 따르는 것의 두 가지 경계(境界)를 떠나서는 마침내 모습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이 깨우침(覺)이 헤어짐과 어울림 어기고 따르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닿음의 자리(觸根)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또 허공(虛空)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왜냐하면 만일
어울릴 때 나왔다면 헤어질 때는 이미 사라져야 할 것이니 어떻게 헤어진 것을 알겠는가? 어기고 따르는 두 모습도 또한 잉하 같으니라.만일 몸에서 나왔다면 반드시 헤어지고 어울리고 어기고 따르는 네가지 모습이 없으리니,다시 말하면 너의 몸으로 느끼는 것이 처음부터 스스로의 본바탕(自性)이 없으리라.반드시 허공(虛空)에서 나온 것이라면 허공(虛空)이 스스로 느끼고 깨우칠 것인데 어찌 네 닿음의 자리(觸根)를 통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냐?그러므로 알아라,몸의 느낌이 거짓되어 미덥지 못하여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니어서 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아난아,비유 하자면 어떤 사람이 있어 고단하면 쉬고 다시 말하면 실컷 자고서 편안하게 깨어나서는 눈앞의 경계(境界)를 보고는 기억하고,기억을 잃으면 잊어버리나니 이것이 뒤바뀌어 나고(生),머물고(住),변하면서(異),결국은 사라지는 것(滅)이거니와 끌어당겨서 익히는 가운데 순서가 결코 어긋나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지의 모양(體)이라 하느니라. 뜻(意)과 고단함이 하나 된 피로한 모습을 헤아려 살펴보는 것(見)을 보리(菩提)라 하느니라.
나고 사라지는 두 가지 거짓된 경계(境界)를 비롯하여 뜻을 모은 가운데(意根) 있으면서 알아차림(內塵)을 끌어당겨 취하고는 기억에 의하여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서 생각하고(逆流)사라져서 잊혀 기억나지 않는 것(不流)은 물론 땅의 이름 까지도 보고 들어서 깨우쳐 아는 것(覺知)을 참다운 모습(性)이라 하거니와 이 깨달아 분별하는 참다운 모습(覺知性)이 저 깨어있고 잠들고 나고 사라지는 두 경계(境界)를 떠나서는 마침내 모습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이와 같이 깨달아 분별하는 자리가 깨어있음이나 잠들어있음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나고 죽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뜻의 자리(意見)는 물론 허공(虛空)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왜냐하면 만일 깨달아 아는 참다운 모습(性)이 깨어있음에서 나온다면 잠들면 따라서 사라질 것이므로 어떻게 잚들음을 알 것이며,분명히 살아있을 때에 있다면 사라질 때에는 없을 것이니 무엇으로 사라진 줄을 알것이며 만일 사라짐으로 해서 있다면 살아있을 적에는 사라짐이 없을 것이니 무엇으로 살아있는 것을 알겠느냐?만일 뜻의 자리(意根)에서 나온 것 이라면 깨어있고 잠들은 두 모습은 몸의 사라지고 어울리는 두 현상을 따를 뿐이니 이 두 모습을 떠나서는 이 깨우쳐 아는 것이 허공(虛空)에 거짓으로 만들어진 꽃 과 같아서 반드시 바탕(性)이 없는 것이리라. 만일 허공(虛空)에서 생긴 것 이라면 스스로 허공(虛空)이 아는 것인데 어찌 너의 앎의 자리(意根)를 통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냐?그러므로 뜻의 자리(意入)가 거짓되어서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3),십이처(十二處)가 곧 여래장(如來藏)
또 아난아,어찌하여 십이처(十二處)가 여래장(如來藏)의 본모습인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妙) 결코 변하지 않는 참다운 모습(眞如)인 본바탕(性)이라 하는지 아느냐? 아난아,네가 또 이 기타 숲과 모든 연못을 보나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은 모습(色)으로 만들어져서 눈으로 보는 것이냐,눈이 모습(色+)의 여러 모양을 만드는 것이냐?만일 살펴보는 자리(眼根)에서 모습의 여러 모양(色相)을 만든다면 허공(虛空)을 볼 적에는 모습의 밑바탕인 참다운 모습(性)이 흩어졌을 것이고,흩어져 다하였다면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 아무 모습(色)도 없는 것이니,이미 없어진즉 누가 허공(虛空)의 바탕을 밝히겠느냐? 허공(虛空)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만일 다시 모습의 경계(境界)가 눈으로 바라보아서 나온다면 허공(虛空)을 볼 적에는 모습이 아니므로 흩어져 사라졌을 것이고 사라졌다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니 누가 허공(虛空)과 모습(色)을 밝히겠느냐? 그러므로 헤아려 살펴봄(見)과 모습(色)과 허공(空)이 모두 머무는 곳이 없어서 다시 말하면 모습(색)과 헤아려 살펴봄(견)의 두 머무는 곳이 거짓되어서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참다운 모습(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네가 이 기타 원(園)에서 밥을 나누려면 북을 두드리고,대중을 모으려면 종(鐘)을 쳐서 종소리 북소리가 앞뒤로 이어지는 것을 듣나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은 소리가 귓가에 오는 것이냐 귀가 소리 나는 곳에 가는 것이냐?
아난아,만일 이 소리가 귓가에 온다면 마치 내가 왕사성에서 밥을 빌 적에 기타 숲에는 내가 없듯이,이 소리가 반드시 아난의 귓가에 왔다면 목련과 가섭은 함께 들을 수 없을 것인데,하물며 千二百五十 명의 스님들이 한꺼번에 종소리를 듣고 모두 식당으로 오는 것이냐? 만일 네 귀가 저 소리 나는 곳 주변에 갔다면 마치 내가 기타 숲에 돌아왔을 적에는 왕사성에 내가 없듯이 네가 북소리를 들을 적에는 그 귀가 북치는 곳에 갔을 것이니 종소리가 같이 나더라도 함께 듣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중에서 코끼리,말,소,양등의 가지가지 소리들뿐 이겠는냐? 만일 오고감도 없다면 들음도 없어야 할 것 이니라.그러므로 들음과 음성이 모두 머무는 곳이 없어서 들음과 소리의 두 머무는 곳이 거짓되어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 (自然)것도 아닌 참다운 모습(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아난아,네가 다시 이 향로(香爐)가운데서 전단향
栴檀香)의 냄새를 맡아 보아라.만일 이 향(香)을 일수(銖*한냥의 24분의1)만 사르더라도 왕사성의 사십 리 안에서 동시에 향기를 맡나니,어떻게 생각하느냐?이 향기가 전단(栴檀)목에서 생기는 것이냐 네코에서 생기는 것이냐,허공에서 생기는 것이냐? 아난아,만일 이 향기가 네코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코에서 생겼다고 일컬었기에 마땅히 코에서 나와야 할 것이며 코가 전단(栴檀)나무가 아닌데 어떻게 코 가운데 전단(栴檀)향이 있겠느냐?
네가 향기를 맡는다고 하였으니 향(香)이 당연히 코로 들어가야 할것인데 코 가운데서 나오는 향기를 맡는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느니라. 만일 허공(虛空)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허공(虛空)의 본바탕(性)이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이니 향기도 마땅히 변하지 말고 있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향로(香爐)를 빌어서 이 고목을 사르는 것이냐? 만일 나무에서 난다면 이 향(香)의 재료를 사루어서 연기가 되었으니 코로 맡을 적에 연기가 코로 들어가야 할 것이거늘 그 연기가 허공(虛空)으로 올라가 멀리 퍼지기도 전에 사십 리 안에서 어찌 맡게 되는 것이더냐? 그러므로 향(香)과 코와 냄새 맡음(齅聞)이 모두 머무는 곳이 없어서 냄새 맡음(齅聞)과 향(香)의 두 경계(境界)가 거짓되어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본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아난아,내가 항상 하루 두 번씩 대중가운데서 발우를 들 적에 이따금 야쿠르트 와 치즈,연유를 만나면 빼어난 맛이라 부르나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맛이 허공(虛空)에서 생기느냐 혀에서 생기느냐 음식에서 생기느냐? 아난아,만일 이 맛이 너의 혀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마침 내 입에는 혀가 하나뿐이니 그 혀가 이때에 야쿠르트 맛이 되었을 것이고 검은 자연산 꿀(石淸)을 먹어도 당연히 달라지지 않을 것이니라.만일 달라지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 할 수 없고 만일 달라진다면 혀가 여러 몸이
아닐 것인데 어떻게 혀 하나로 여러 맛을 알겠느냐? 만일 음식에서 생긴다면 음식은 슬기(智慧)가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스스로 알 것이며 또 음식이 스스로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니 너와 어떻게 관여되었기에 맛을 안다하느냐?
만일 허공(虛空)에서 생긴다면 네가 허공(虛空)을 깨물어 보아라.허공(虛空)이 무슨 맛이 있겠는냐?만일 허공(虛空)이 짜다면 이미 네 혀를 짜게 하였으니 네 얼굴도 짤것이고 그러면 이 세계의 사람들이 바닷물고기와 한 가지일 것이고 항상 짜기만 하다면 담담한 것은 알지 못할 것이요,만일 담담함을 알지 못한다면 역시 짠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아는 것이 없다면 무엇을 맛이라 부르겠느냐? 그러므로 맛과 혀와 맛보는
것이 모두 머무르는 곳이 없어서 맛보는 것과 맛의 두 경계(境界)가 거짓되어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도 아닌 참다운 모습(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아난아,네가 언제나 이른 아침마
다 손으로 머리를 만지나니 어떻게 생각하느냐?이 만져서 아는바 어느 것이 스스로의 닿음(能觸)이냐,손이 스스로 닿았느냐(능觸),머리가 스스로 닿았는냐(能觸)? 만일 손 에 있다면 머리는 앎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닿음(觸)이 되며 만일 손 에 있다면 머리는 앎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닿음(觸)이 되며 만일 머리에 있다면 손은 쓸모가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닿음(燭)이라 부르는 것이냐? 만일 각각 있다면 너 아난이 마땅히 두 몸이리라. 만일 머리와 손이 하나의 닿음(觸)으로 생기는 것이라면 당연히 손과 머리가 한 몸이 되어야 할 것이고 만일 한 몸이라면 닿음(觸)을 이룰 수 없으며 만일 두 몸이라면 닿음(觸)을 어디에 맡겨야 하느냐
스스로의 닿음(能觸)에 맡긴다면 한쪽은 주체(主體)가 아닐 것이고 주체(主體)가 아닌 쪽은 스스로 닿음(能觸)이 아닐 것이며 허공(虛空)이 너를 위하여 닿음을 이루지도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깨닫는 닿음(觸)과 몸이 모두 머무르는 곳이 없어서 몸과 닿음(觸)의 두 경게가 거짓되어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본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아난아,언제나 네 헤아림 속에 얽매어진 착한 모습(善性)과 악한 모습(惡性)과 부질없는 짓을 하는 모습(無記性)이 도리 (法則)를 이루어 생기나니 이 도리(法)가 마음에서 생기는냐 마음을 떠나서 따로 머무르 곳이 있느냐?
아난아,만일 도리(法則)라는 것이 마음에서 생겼다면 이 도리가 경계(境界)도 아니고 마음에 얽어매어진 것도 아니므로 어느 곳에서 이루어 진 것이냐? 만일 마음을 떠나서 따로 머무는 곳이 있다면 이 도리(法)의 스스로의 참다운 모습(性)이 분별하는 것(知)이냐 분별하는 것(知)이 아니냐? 분별하는 것(知)을 곧 마음이라
부른다면 분별하는 것(知)이 너와는 다르겠고,경계(境界*보이는현상)는 아니므로 다른 사람이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 같을 것이며 네가 곧 마음이라면 어찌하여 네 마음이 둘이 되는 것이냐?만일 분별하는 것(知)이 아니라면 이 경계(境界*눈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라 이름 붙일 수 없음)는 이미 모습(色),소리(聲),냄새(香),맛(味),과 떨어짐과 어울림 차가움과 따뜻함 과 허공(虛空)의 모습이 아니니 어디 있는 것이냐? 이제 모습(색)과 허공(虛空)에 모두 표시 할 수 없고 사람들은 허공(虛空)바깥에 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다고 여기느니라.마음이라면 얽매이진 것이 아니니 어느 곳에다 세우려 하느냐? 그러므로 도리와 마음이 모두 머무는 곳이 없어서 뜻의 자리(意根)와 도리의 경계(境界)가 거짓되어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본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3) 십팔계(十八界)가 곧 여래장(如來藏)
다시 아난아,어찌하여 십팔계(十八界)가 여래장(如來藏)의 참다운 모습(性)인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妙)결코 변하지 않는 참다운 모습(眞如)인 본바탕(性)이라 하는지 아느냐?아난아,네가 밝혔듯이 눈과 모습(色)이 얽어매어져서는(緣)눈의 헤아림(眼識)이 생긴다 하니 이 헤아림(識)은 눈을 비롯하여 생겼으므로 눈의 세계(眼界)라 하겠느냐? 물질의 밑바탕을 비롯하여 생겼으므로 모습의 세계(色界)라 하겠느냐?아난아,만일 눈을 비롯하여 생긴다면 이미 모습(色)과 허공(虛空)이 없으므로 나누어 가릴 것이 없을 것이니,네 헤아림(
식)이 있다한들 어디에 쓰겠느냐? 네 헤아려 살펴봄(見)이 푸른 색,노란 색,붉은 색,하얀 색이 아니어서 표시도 할 수 없는데 어디에다 모습의 세계(色界)를 세울 것이냐? 만일 모습을 비롯하여 생긴다면 텅 비어 모습이 없을 때에 너의 헤아림(識)은 당연히 사라질 것이니 어떻게 헤아림(識)이 허공의 성질(性質)을 알겠느냐?
만일 모습(色)이 변할 때 너 또한 모습(色)이 바뀌어 변하는 것을 안다면 너의 헤아림(識)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모습의 세계(色界)가 무엇을 따라서 세워지겠느냐? 변하는 것을 따른다면 변할 것이니 세계의 모습이 스스로 없을 것이고 변하지 않는다면 항상 할 것이니 이미 모습(色)에 의해 생긴 것이므로 당연히 헤아림(識)이 허공(虛空)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해야 하리라.만일 두 가지를 아울러 눈과 모습(色)에서 함께 생긴다면 어울릴 땐 중간(眼識)이 떨어질 것이고 떨어질 땐 두 곳에서 어울릴 것(眼識이 양쪽으로 나뉜다면)이니
몸의 참다운 모습(體性)이 섞이어 어지러우므로 어떻게 세계를(界)를 세우겠는냐? 그러므로 눈과 빛이 얽어매어져서는(緣)눈의 헤아리는 세계(眼識界)가 생긴다 하거니와 세 곳이 모두 머무는 데가 없어서 눈(眼)과 모습(色)과 모습의 세계(色界)가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본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또 네가 밝혔듯이 이 귀와 소리가 얽어매어져서는(緣)귀의 헤아림(耳識)이 생긴다하니 이 헤아림(耳識)이 귀를 비롯하여 생긴다 해서 귀의 세계(耳界)라 하여야 하느냐? 소리를 비롯하여 생긴다 해서 소리의
세계(聲界)라 하여야 하는냐?아난아,만일 귀를 비롯하여 생긴 것이라면 소리 남과 소리 안남의 두 모습을 이미 알 수 없음으로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고,오히려 알것이 없으면 귀의 세계(耳界)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헤아림(識)은 어떠한 모습이더냐? 만일 귀로 듣느 다고 한다면 소리 남과 소리 안남의 두 모습이 없으므로 듣는 다는 것이 이뤄 질 수 없으며 어떻게 귀의 모습과 닿은 현상(觸塵)들이 섞인 것을 귀의 헤아리는
세계(耳識界)라 부르겠느냐? 다시 말하면 귀의 헤아리는 세계(耳識界)를 무엇을 의지해 세우려는 것이냐?
만일 소리에서 생긴다면 헤아림(識)은 소리를 비롯하여 있는 것이므로 들음(聞)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고 들
음이 없으면 여러 가지 소리의 모습(聲相)이 머무를 곳이 없으리라.헤아리는 것 소리를 따라 생긴다고 하고 소리는 들음(聞)을 비롯하여 소리의 모습(聲相)이 있다 한다면 들을 적에는 헤아림(識)을 들어야 하리라.듣지 못한다면 소리의 세계(聲界)아니고,듣는다면 소리와 같아져서 헤아림(識)을 이미 들었으니 누가 헤아림(識)을 듣는 것이냐? 만일 아는 자가 없다면 마침내는 초목(草木)과 같을 것이니라.소리와 들음이 섞이어 귀의 헤아리는 세계(耳識界)라는 가운데 자리가 없다면 귀와 소리라는 안팎의 모습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냐
그러므로 귀와 소리가 얽어매어져서는 (緣)귀의 헤아리는 세계(耳識界)를 낸다 하거니와 세 곳이 모두 머무는 데가 없어서 귀와 소리와 소리의 세계(聲界)가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 (自然)것도 아닌 본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아난아,또 네가 밝혔듯이 코와 향(香)이 얽어매어져서는(緣)코의 헤아림(鼻識)이 생긴다 하니 이 헤아림(識)은 코로 비롯하여 생긴다 해서 코의 세계(鼻界)라 하여야 하느냐? 향(香)을 비롯(姻)하여 생긴다 해서 향기의 세계(香界)라 하여야 하느냐? 아난아,만일 코로 비롯하여 생긴다면 네 마음속에서는 무엇을 코라 할 것이냐?살로 된 두개의 골무(*손가락에 끼고 바느질 할 때 씀,콧구멍을 비유하는 듯)모양을 취하느냐,냄새를 맡아 아는 흔들리고 움직이는 본바탕(性)을 취하느냐? 만일 살 로 된 모양을 취한다면 살로 된 것은 몸이요,몸으로 아는것은 닿음(觸)이니,몸이라 부르는 것은 코가 아니고
닿음(觸)이라 부르는 것은 장소(塵)이니 바라건데 코라고 불리는 것이 없거늘,어떻게 코의 세계(鼻界)를 세우겠는냐? 만일 냄새를 맡아 아는 것을 취한다면 네 마음속에 무엇이 안다 하느냐? 살갗으로 안다면 살갗으로 아는 곳은 닿음(觸)이지 코가 아니니라.허공(虛空)이 안다면 허공(虛空)은 스스로 아는 것이므로 당연히 살이 깨닫는 것은 아닐 것이니,그렇다면 허공(虛空)이 곧 너고 네 몸은 아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아난이 머무르는 곳이 없으리라. 향(香)이 안다면 앎(知)이 스스로 향(香)에 닿았거니와 어찌하여 너를 기다리겠는냐?
만일 향기와 냄새가 분명히 내코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저 향기와 냄새 두 종류의 기운이 난초와 전단나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니,너는 스스로의 코를 냄새 맡아 보아라.향기가 나는냐 냄새가 나는냐? 냄새가 난다면 향(香)이 아니고 향기롭다면 냄새나지는 않을 것이니라.만일 향기롭거나 냄새나는 것을 모두 맡을 수 있다면 한 사람이 두개의 코를 가졌다는 것이고,나에게 도리를 묻는 아난이 둘이 있다는 것이니 어느 것이 네 몸이냐?만일 코가 하나라면 향기와 냄새가 둘이 없을 것이니 처음부터 냄새가 향기가 되고 향기도 냄새가 되어 두 개의 바탕(性)이 있지 아니 할 것이니 세계가 어디에 의지하여 서겠느냐? 만일 향기를 비롯하여
생긴다면 헤아림(識)이 향(香)을 비롯하여 있는것이니 마치 눈에 비롯하여 있는 헤아려 살펴봄(見)이 눈을 보지 못하듯이 향(香)을 비롯하여 있으므로 당연히 향(香)을 알지 못할 것이니라.안다면 생긴 것이 아니요,알지 못하면 헤아림(識)이 아니며 향(香)이 아는 것이 없으면 향(香)의 세계(香界)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헤아림(識)이 향(香)을 알지 못하면 세계를 비롯해서 향(香)까지 이루어질 수 없느니라. 이미 코의 헤아림(鼻識)이 없으면 코와 향기가 이루어지지 않았서 저 모든 냄새 맡는 바탕(性)이 마침내는 거짓이 되느니라.이와 같이 코와 향(香)이 얽어매어져서는(緣) 코의 헤아리는 세계(鼻識界)가 생긴다 하거니와 세 곳이 모두 머무르는 데가 없어서 코와 향(香)과 향의 세계(香界)가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본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또 네가 밝혔듯이 혀와 맛(味)이 얽어매어져서는(緣) 혀의 헤아림(舌識)이 생긴다 하니 이 헤아림(識)은 혀로 비롯하여 생긴다 해서 혀의 세계(설계)라 하여야 하느냐? 맛(味)을 비롯하여 생긴다 해서 맛의 세계(味界)라 하여야 하느냐? 아난아,만일 혀로 비롯하여 생긴다면 세간(世間)에 있는 사탕수수,검은 향나무,노란 연꽃, 돌소금,족두리 풀,생강,계수나무가 모두 맛(味)이 없을 것이니 네가 스스로 혀를 맛(味)보아라
다냐 쓰냐? 만일 혀의 참다운 모습(性)이 쓰다면 누가 혀로 맛(味)을 보는 것이냐? 혀가 스스로 맛(味)보지 못할 것이니 누가 깨우쳐 아는 것이냐? 혀의 참다운 모습(性)이 쓰지 않다면 맛(味)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니 어디에 혀의 헤아리는 세계(舌識界)를 세우겠는냐? 만일 맛(味)에 비롯하여 생긴다면 헤아림(識)이 스스로 맛(味)이 되는 것이므로 맛(味)을 보는 자리(舌根)가 스스로 맛(味)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떻게 헤아림(識)이 맛(味)아닌지 알겠는냐? 또 온갖 맛(味)이 한 물건에서 생긴는 것이 아니라 맛(味)이 이미 다양하게 생겼으니 헤아림(識)도 여러 가지 모습을 갖춰야 할 것이니라,만일 헤아림(識)의 모습이 반드시 맛(味)에서 난다면 짜고 달고 맵고 서로 어울려서 만들어지는 등 온갖 다양한 것들이 한 맛(味)이 되어서 나누어 가를 (分別)수 없을 것이요,나누어 가를 수 없으면 헤아림(識)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혀를 맛이 헤아리는 세계(舌識界)라 부를 수 있겠는냐? 허공(虛空)에서 내마음의 헤아림(識)이 생기지 않으리라.
혀와 맛(味)이 서로 어울려서 생긴다면 이 가운데는 스스로의 본바탕(自性)이 없는 것이니 어떻게 맛의 세계(味界)가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혀와 맛(味)이 얽어매어져서는 (緣)혀의 헤아리는 세계(舌識界)가 생기는 것이라 하거니와 세 곳이 모두 머무는 데가 없어 혀와 맛(味)내지 혀의 세계(舌界)가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본바탕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또 네가 밝혔듯이 몸과 닿음(觸)이 얽어매어져서는(緣)몸의 헤아림(身識)이 생긴다 하니,이 헤아림(識)이 몸에 비롯하여 생긴다 해서 몸의 세계(身界)라 하여야 하느냐? 닿음(觸)에 비롯하여 생긴다 해서 닿음의 세계(觸界)라 하여야 하느냐? 아난아,만일 몸에 비롯하여 생긴다면 반드시 어울려 뭉치고 헤어지는 것(合離)을 살피고 알아야 하는 얽어매는 것(緣)이 없을 것이니 몸이 어찌 헤아림이 있겠는냐? 만일 닿음(觸)에 비롯하여 생긴다면 반드시 네 몸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몸이 아니라면 어울려서 뭉치고 헤어지는 것(合離)을 아는 것이 있겠느냐? 아난아,물건은 닿아도 알지 못하지만 몸은 닿음(觸)을 아느니라.몸이 아는 것을 닿음(觸)이라 하고 닿음(觸)이라 하고 닿음(觸)을 아는 것을 몸이라 하나니,다시 말하면 닿음(觸)은 몸이 아니고 몸은 닿음(觸)이 아니니라.몸과 닿음(觸)의 두 모습이 처음부터 머무는 곳이 없나니 닿음(觸)이 몸에 어울렸으면 몸과 한 모습 일 것이요,몸과 헤어졌자면 이것은 허공(虛空)과 같은 모습이리라.
안(內*몸)과 밖(外*닿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가운데(中*헤아림)를 어떻게 내세우겠느냐? 가운데를 내세울 수 없으면 안팎의 모습(性)이 허공(虛空)과 같을 것이니 네 헤아림(識)이 생긴다면 어디다 닿음의 세계(觸界)를 세우려느냐? 그러므로 몸과 닿음(觸)이 얽어매어져서는(緣)몸의 헤아리는 세계(身識界)가 생기는 것이라 하거니와 세 곳이 모두 머무는 데가 없어 몸과 닿음(觸)내지 몸의 세계(身界)가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본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만일 뚯(意)에 비롯하여 생긴다면 네 뜻 속(意中)에 반드시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네 뜻(意)을 환하게 들춰낼 것이니 만일 앞에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뜻(意)이 생기지 않으리라. 얽어매어짐과 헤어져서는 어떠한 현상도 안 일어날 것이니 헤아림(識)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냐?또 너의 헤아려 아는 마음(識心)이 온갖 생각하는 마음(思量)과 분석해서 결정짖는(了別)마음 이 두마음과 더불어 같다 하느냐 같지 않다 하느냐? 같다면 뜻(意)은 뜻(意)일 것인즉 어떻게 다른 뜻(異意)이 생길 수 있으며,뜻(異)이 같지 않다면 마땅히 헤아림(識)이 머무를 곳이 없어야 할 것이니라. 만일 헤아림(識)이 머무를 곳이 없다면 어떻게 뜻(意)에 의해 생긴다 할 수 있겠는냐?만일 뜻(意)이 머무를 곳이 있다면 어떻게 헤아림(識)에 의한 뜻(意)이라 하겠느냐?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두 가지 성질이 이루어 질 것이 없으면 어떻게 뜻을 헤아리는 세계(意識界)를 세우겠는냐? 만일 드러난 모습(法一現像)에 비롯하여 생긴다면 세간의 모든 현상(法*現像)이 모습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음(五塵)과 헤어지지 못하나니 네가 살펴보아라.
모습의 여러 가지 현상(色法),소리의 여러 가지 현상(聲法),냄새의 여러 가지 현상(香法),맛의 여러 가지 현상(味法),닿음의 여러 가지 현상(촉법)들이 분명하여 다섯 가지 자리(눈,귀,코,혀,몸)에 서로 마주 하는 것이므로 뜻(意)을 받아들일 곳 없느니라. 네 헤아림(識)이 반드시 현상(法)에 의해서 생긴다면,너는 지금 자세히 살펴보아라.존재(法*有)의 현상(法*塵,現像)은 어떠한 모양이겠느냐?만일 모습과 텅 빔(虛空),움직임과 고요함,통함과 막힘,어울림과 헤어짐,나고 죽음의 두 모습이 나뉜다면 이 온갖 현상(現像*法)이 사라지는 것이니라.드러난 모습(法*現像)이 비롯할 바가 없다면,비롯하여 생겼다는 헤아림(識)이 무슨 모습을 띠고 나타났으며(作)모습이 없다면 뜻의 세계(意界)가 어떻게 생기겠느냐?그러므로 뜻(意)과 드러난 모습(法*現像)이 얽어매어져서는(緣) 뜻을 헤아리는 세계(意識界)가 생긴다 하거니와 세 곳이 모두 머무는 데가 없어 뜻(意)과 드러난 모습(法*現像)내지 뜻의 세계(意界)가 처음부터 인연도 아니고 스스로 그런(自然)것도 아닌 본바탕(性)이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14, 칠대(七大)에서 여래장(如來藏)을 보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말하였다."온 누리에서 제일 존귀하신 분(世尊)이시여! 여래께서 항상 서로 어울려 뭉침(和合)에 대한 인연을 말씀하실 적에"온갖 세간(世間)의 가지가지 변화 하는 것이 다 사대(四大-地,水,火,風)
의 서로 어울림으로 비롯하여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니라"하시더니 어찌하여 여래께서 자연과 인연을 다 물리치시는 것입니까?제가 지금 생각을 모아본 바 이 도리를 알지 못하오니 불쌍히 여기시어 중생들에게 중도(中道)의 환하게 밝은 도리(了義)와 말장난(戲論*부질없어 아무 이익이 되지 않는 말)이 나닌 참다운 도리(法)를 가르쳐주시옵소서."이때 온 누리에서 제일 존귀한 분(世尊)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네가 먼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및 모든 소승 법(小乘法)을 싫어하였고 마음 내어 부지런히 첬째가는 빼어난 깨달음을 구하므로 내가 지금 너에게 첫째가는 참다운 도리를 가르쳤는데,어찌하여 세간의 말장난(戲論)과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것을 참이라고 여기는 어이없고 미덥지 못한 생각인 인연에 스스로 얽메이느냐? 네가 비록 듣기는 많이 해서 외우고는 있다마는,마치 약을 말하는 사람이 진짜 약을 앞에 놓고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여래가 말하기를 "진실로 불쌍하다."하는 것이니라.너는 지금 자세히 들어라.내가 이제 나누고 가리어(分別)서 가르쳐 줄 것이며 지금에 와서 대승(大乘)을 닦으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모습을 꿰뚫어 깨우치게 하리라."아난이 잠자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아난아,네가 말하기를'사대(地水火風)가 서로 어울리고 뭉침(和合)으로 세간(世間)의 가지가지 변화가 환하게 들춰진다.'하였거니와 아난아,만일 저 대(大*물질의 기본元素)의 참다운 밑바탕(性體)이 서로 어울려
뭉침(和合)이 아니라면 모든 대(大)와 더불어 섞이어 어울리지 못할 것이니,마치 텅 빔(虛空)이 온갖 모습과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만일 서로 어울려 뭉친다면(和合)변화하는 것과 같아서 처음과 끝이 서로 이루어질 것이고,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서로 뒤를 이어서 나고 죽고,죽고나며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죽고 또 죽어서 마치 불붙은 바퀴가 멈추지 않고 돌 듯 쉴 틈이 없으리라.네가 지대(地大)의 참다운 모습(性)을 보아라 거친 것은 대지(大地)를 이루고 작은 것(細)은 미진(微塵*물질의기본요소-궁극의작은 것인極微를7배한 것을 微塵-아누ANU,微塵을7배 한 것을 금진,金塵7배 한 것을水塵)을 이루거니와 인허진(鄰虛塵*極微.param anu)은 저 미진(微塵)인 빛 알갱이를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서 그 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인허진(鄰虛塵)을 다시 나누면 그 한 조각이 진실한 공(空)의 참다운 모습(性)이니라.아난아,만일 이 인허진(鄰虛塵)을 나누어서 그 한 조각으로 공(空)이 이루어지면 마땅히 공(空)이 빛(色)의 모습을 생기게 해서 나타낸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네가 지금 묻기를'서로 어울리고 뭉침(和合)으로 말미암아 세간(世間)의 모든 변화하는 모습이 생긴다 하였거니와 네가 살펴보아라.하나의 인허진(인虛塵)은 공(空)이 얼마나 서로 어울려서 이루어 졌겠는냐? 인허진(鄰虛塵)이 서로 어울려서 인허진(隣虛塵)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리라.
또 인허진(鄰虛塵)을 나누어 공(空)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모습(색)의 알갱이를 나누어서 허공(虛空)을 이루었겠는냐? 만일 모습(色)을 모아놓았을 때는 모습(色)을 모아놓은 것이라서 공(空)이 아닐 것이고.만일 공(空)을 모아놓았을 때는 공(空)을 모아놓은 것이라서 모습(色)이 아닐 것이니라.모습(色)이야 나눌 수 있다 하더라도 공(空)이야 어떻게 모아놓을 수 있겠는냐? 네가 아직도 모르는구나.여래장(如來藏)중에 본바탕(性)이 모습(色)인 참다운 공(眞空)과 본바탕(性)이 공(共)인 참다운 모습(眞色)이 맑고 깨끗하며 처음부터 그러하여(本然) 모든 현상계(법계*現象界)에 가득 차서 중생들의 마음을 따르고 그들이 헤아리는 만큼만 어울려 함께하는 것이니라.업(業)을 따라서 이제 드러내는 것이거늘 세간(世間)의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인연으로 이루어졌다느니,스스로 그런 (自然性)이라느니 하며 헤매나니,다 헤아려 아는 마음(識心)으로 나누어 가리고(分別)헤아려보는 것이라서 다만 말만 무성할 뿐이지 전혀 진실한 도리는 없느니라. 아난아,화대(火大)의 참다운 모습(性)은 나(我)가 없어서 온갖 얽어 매어짐에 맡기나니,네가 이 성중(城中)에서 아직 밥 먹지 못한 집을 살펴보아라,밥을 지으려 할 때에 손에 양수(陽燧*해에 비춰본다 하니 돋보기인 듯)들고 해에 비추어 불을 구하느니라.아난아,만일 이 불의 참다운 모습(火性)이 서로 어울려져서 있는 것이라면 저 손에 돋보기를 쥐고 해로부터 불을 구하나니,이 불(火)이 돋보기에서 나오느냐 쑥에서 나오느냐 해에서 나오느냐
아난아,만일 해에서 나온다면 스스로 네 손에 있는 쑥을 태울 것이니 오는 곳의 숲과 나무를 다 태워야 마땅하느니라.
만일 돋보기에서 나온다면 스스로 돋보기에서 나오는 것이니 쑥을 태우면서 돋보기는 어찌하여 녹지 않는 것이냐? 네 손에 쥐어져 있으면서 오히려 덥지도 아니한데 어찌하여 녹겠느냐? 만일 쑥에서 생긴다면 어찌하여 해의 밝은 빛과 돋보기가 서로 엇갈린 뒤에야 불이 생기는 것이냐? 네가 또 자세히 살펴보아라.돋보기는 손에 쥐어져있고 해는 하늘에서 나오고 쑥은 처음부터 땅에서 나온 것인데 불은 어느 방향을 지나서 여기 오는 것이냐? 이 해와 돋보기는 서로 멀리 떨어져있어서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뭉치는 것도 아니어서 불빛이 나오는데 없이 스스로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니라.네가 알지 못하는구나.여래장(如來藏)중에 본바탕(性)이 불(火)인 참다운 공(眞空)과 본바탕(性)이 공(空)인 참다운 불(眞火)이 맑고 깨끗하며 처음부터 그러하여
(本然)모든 법계(法界*現象界,온세상)에 가득 차서 중생들의 마음을 따르고 그들이 헤아리는 만큼만 어울려
함께하는 것이니라.아난아,마땅히 알아라. 세상 사람들이 한 곳에서 돋보기를 쥐고 있으면 한 곳에서 불이 생기고 온 세상(法界)에 가득하게 쥐고 있으면 온 세상에 가득 불이 일어나는 것이니 어찌 따로 오고 가는 곳이 있겠느냐? 업(業)을 따라서 이제 드러내는 것이어서 세간의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인연으로 이루어졌다느니,스스로 그런 모습(自然性)이라느니 하며 헤매나니,다 헤아려 아는 마음(識心)으로 나누어 가리고(分別)헤아려보는 것이라서 다만 말만 무성할 뿐이지 전혀 진실한 도리는 없느니라. 아난아,물의 참다운 모습(性)은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흐름이 멈춤이 없어변하지 않는 모습이 없느니라.
왕사성의 카필라 신선(*상카야학파의 개조)차크라 신선,파드마,하스타등 대 마술사들이 달의 정기를 구하여
마술하는 약을 만들 적에 온갖 마술사들이 백월(白月*1-15일까지의 달)의 밤중에 방제(方諸* 달에서 물을 받는 진주거울,다른말로 큰조개(大蛤)로 달밑에 놓아두면 물이 생긴다고 함.(큰 조개는 蜃氣樓를 만듦)를 들고 달 가운데 물을 받나니,이 물이 진주(珍珠)에서 나오는냐 허공(虛空)중에 스스로 있느냐 달에서 이루어지는냐? 만일 달 에서 나온다면 오히려 먼 곳에서 진주 쪽으로 물이 나오는 것이니 지나오는 숲과 나무마다 물이 흘러야 할 것이고,흐른다면 어찌 방제(方諸)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냐? 흐르지 않는다면 맑은 물이 달에서 내려오는 것은 아닐 것이니라.만일 방제(方諸)에서 나온다면 이 진주(珍珠)속에서 항상 물이 흘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밤중에만 보름 동안(白月書)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 만일 허공(虛空)에서 생긴다면 허공의 본바탕(性)이 끝이 없으므로 물도 끝이 없어서 인간과 하늘이 물에 젖어서 모두 흙탕물에 빠질 것이니 어떤 물이 땅과 허공을 흐르는 것이냐? 네가 또 자세히 살펴보아라. 달은 하늘에 올라있고 진주(珍珠)는 손에 가지고 있고 진주(珍珠)를 받드는 대아는 처음에 사람이 펼처놓은 것이니 물이 어느 곳에서 흘러와서 여기로 흐르는 것이냐? 달과 진주(珍珠)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울리는 것도 뭉치는 것도 아니어서 물위 정기(精氣)가 나오는데 없이 스스로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니라.
네가 아직도 모르는구나. 여래장(如來藏)중에 본바탕(性)이 물인 참다운 공(空)과 본바탕(性)이 공(空)인 참다운 물(水)이 맑고 깨끗하며 처음부터 그러하여(本然)모든 법계(法界*現象界,온세상)에 가득 차서 중생들의 마음을 따르고 그들이 헤아리는 만큼만 어울려 함께하는 것이니라. 한 곳에 진주(珍珠)를 쥐고 있으면 한 곳에 물이 나오고 온 세상에 가득 쥐고 있으면 온 세상(世上)에 가득 생기어서 세간(世間)에 가득하나니,어찌 따로 오고 가는 곳이 있겠느냐? 업(業)을 따라서 이제 드러내는 것이거늘 세간(世間)의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인연으로 이루어졌다느니,처음부터 그런 모습(本然性)이라느니 하며 헤매나니,다 헤아려 아는 마음(識心)으로 나누어 가리고(分別)헤아려 보는 것이라서 다만 말만 무성할 뿐이지 전혀 진실한 도리는 없는 것이니라.아난아,바람(風)의 참다운 모습(性)이 모양(體)이 없어서 움직임과 고요함이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느니라. 네가 옷을 가지런히 입고 대중들 속으로 들어갈 때 승복이 펄럭거려 움직임이 옆에 사람에게 전해질 때 가벼운 바람이 저 사람의 얼굴에 스치나니 이 바람은 가사(袈裟)자락에서 나오는 것이냐 허공(虛空)에서 들춰내는 것이냐 저 사람의 얼굴에서 생기느냐? 아난아,이 바람이 만일 가사자락에서 나온다면 네가 바람을 입었으니 네가 내 가사(袈裟)를 보아라,바람이 어느 곳에 있느냐? 가사(袈裟)속에 바람의 참모습
(地* 성질,바탕)이 어디에 숨어 있느냐? 가사 속에 바람의 참다운 모습을 숨기지는 아니 하였으리라.만일 허공(虛空)에서 생긴다면 네 가사(袈裟)가 펄럭이지 아니 하였을 때에는 어찌하여 바람이 일지 않는 것이냐?
허공(虛空)의 성질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니 바람도 언제나 생겨야 할 것이니라,만일 바람이 사라졌을 때에는 허공(虛空)도 당연히 사라져야 하련마는 바람이 사라지는 것은 볼 수 있거니와 허공(虛空)이 사라지는 것은 어떤 모양이더냐? 만일 생기고 사라지면 허공(虛空)이라 부를 수 없으려니와 허공(虛空)이라면 어떻게 바람이 나오겠느냐? 만일 바람이 저 사람의 얼굴에서 바람이 스스로 생긴다면 저 사람의 얼굴에서 생긴 것이므로 당연히 너에게 불오와야 할 것이거늘,스스로 네 가사(袈裟)는 가지런히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바람이 거꾸로 부는 것이냐?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가지런한 가사(袈裟)는 너에게 있고 얼굴은 저 사람한테 붙어있고 허공(虛空)은 평온하여 흐르거나 움지이지 않거늘 바람은 스스로 어디에서 불어서 이쪽으로 오는 것이냐? 바람과 공(空)의 성질(性質)은 나뉘어져서 서로 어울리는 것이 아니므로 바람의 성질이 오는 곳이 없이 스스로 있지는 않을 것이니라.네가 분명하게 모르는구나.여래장(如來藏)중에 바탕(性)이 바람(風)인 참다운 공(空)과 바탕(本然)모든 법계(法界*현상계,온세상)에 가득 차서 중생들의 마음을 따르고 그들이 헤아리는 만큼만 어울려 함께 하는 것이니라.아난아,너 한 사람이 가사(袈裟)를 펄럭거리면 가벼운 바람이 나오고 법계(法界*現象界,온 세상)에 가득하여 떨리면 온 세상에 가득 생기나니 어찌 따로 오고 가는 곳이 있겠는냐? 업(業)을 따라서 이제 드러내는 것이거늘 세간(世間)의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인연으로 이루어졌다느니,처음부터 그런 모습(本然)이라느니 하며 헤매나니,다 헤아려 아는 마음(識心)으로 나누어 가리고(分別)헤아려 보는 것이라서 다만 말만 무성할 뿐이지 전혀 진실한 도리는 없는 것이니라.
아난아,공(空)이 참다운 모습(性)이 생김새가 없어서 모습(色)을 비롯하여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라.이 왕사성에서 강이 먼 곳에 있으므로 왕족이나 바라문족,바이샤족,스드라 족 과 파라다(바라문족 중에서 눈동자가 둘인 종족)족과 찬드라족 등이 집을 새로 지으면서 우물을 뚫어 물을 구할 적에 흙이 일척(尺)나오면 가운데 일척의 허공(虛空)이 생기고 이와 같이 흙이 일장(丈)쯤 나오면 가운데가 바뀌어져 일장의 허공(虛空)을 얻을 수가 있느니라. 허공(虛空)의 얕고 깊음이 흙의 많고 적게 나옴을 따르나니 이 공(空)이 당연히 흙을 비롯하여 나오는 것이냐 뚫음으로써 있는 것이냐 비롯됨(因)없이 스스로 생긴 것이냐? 아난아,만일 이 허공(虛空)이 비롯함이 없이 스스로 생긴 것이라면 아직 흙을 뚫기 전에는 어찌 가로막는 어려움이 있어서 오직
넓고 큰 땅덩어리만 보이고 멀리까지 막힘이 없이 환한 뚫림이 없는 것이냐? 만일 흙을 비롯하여 나오는 것이라면 흙이 나올 때에 공(空)이 들어감을 당연히 보아야 할 것이며 만일 흙이 먼저 나오고 공(空)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허공(虛空)이 흙을 비롯하여 나온다 하겠느냐? 만일 나오거나 들어감이 없다면 당연히 공(空)과 흙이 본디 다른 비롯이 없는 것이며,다르지 않으면 같은 것인데 흙이 나올 때에 어찌하여 허공(虛空)이 나오지 않는 것이냐? 만일 뚫음(鑿)을 비롯하여 나오는 것이라면 뚫어서 허공(虛空)이 나오는 것인즉
당연히 흙은 나오지 않아야 할 것이며 뚫음(鑿)을 비롯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뚫어서 스스로 흙이 나오는데 어떻게 공(空)을 보게 되는 것이냐?
너는 자세히 보아라,자세히 살펴보아라,깊고 자세하게 곰곰히 따져 살펴보아라. 뚫는 것은 사람의 손을 따라 여러 방향으로 움직여 부려지는 것이고.흙은 땅을 비롯하여 옮겨지는 것이니 이와 같이 허공(虛空)은 무엇을 비롯하여 나오는 것이냐? 뚫음(鑿)과 공(空)이 하나는 보람 없고 하나는 참된 것이라 서로 뭉쳐 어울릴 수 없으니 허공(虛空)이 스스로 나오는 곳도 없이 스스로 생기지는 아니 했을 것이니라.만일 이 허공(虛空)의 참다운 모습(性)이 뚜렷하고 그득하여 본디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면 지금,땅,물,불,바람(地,水,火,風)과 함께 오대(五大)라고 불러야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바탕(性)이 참되고 통하여 막히는 데가 없어서 다 여래장(如來藏)이므로 본디 나고 사라짐이 없느니라.아난아,네 마음이 흐리멍텅하여 사대(地,水,火,風)가 본디 여래장(如來藏)임을 깨닫지 못하나니 이 허공(虛空)을 보라.나오는냐 들어오느냐 들고 남이 없느냐? 네가 전혀 알지 못하는구나.여래장(如來藏)중에 본바탕(性)이 깨우침(覺)인 참다운 공(空)과 본바탕인 공(空)인 참다운 깨우침(眞覺)이 맑고 깨끗하며 처음부터 그러하여(本然) 모든 법계(法界*現象界)에 가득 차서 중생들의 마음을 따르고 그들이 헤아리는 만큼만 어울려 함께하는 것이니라. 아난아,한 우물이 공(空)하면 공(空)이 한우물만큼 생기면 온 누리의 허공(虛空)도 역시 이와 같아서 온 누리에 뚜렷하게 가득 하나니
어찌 머무는 곳이 따로 있겠는냐? 업(業)을 따라서 이제 드러내는 것이거늘 세간의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인연으로 이루어졌다느니,
처음부터 그런 모습(本然)이라느니 하며 헤매나니,다 헤아려 아는 마음(識心)으로 나뉘고 가리어(分別)헤아려 보는 것이라서 다만 말만 부성할 뿐이지 전혀 진실한 도리는 없느니라.아난아 헤아려 살펴봄(見)의 깨우침(覺)이 스스로는 알 수 없음으로 모습(色)과 공(空)에 비롯하여 있느니라.네가 지금 기타 숲에 있을 적에 아침에는 밝고 저녁에는 어두우며 말하자면 밤중에라도 보름달은 빛나고 그믐날에는 어두운즉 밝고 어두움을 비롯하여 헤아려 살펴봄(見)으로 나누어 밝히는 것이니라.이 헤아려 살펴봄(見)밝고 어두움과 더불어 참다운 도리의 모습(相井)인 처음의 허공(太虛空)과 한 몸을 이루느냐 한 몸을 이루지 않는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며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는 것이냐? 아난아,이 헤아려 살펴봄(見)이 만일 밝음과 어둠내지 처음의 허공(太虛空)과 본디 한 몸이라면 밝음과 어둠이 두 몸을 잃는 것이라서 어두울 때에는 밝음이 없고 밝을 때에는 어둡지 아니해야 하리라.만일 헤아려 살펴봄(見)이 어둠과 하나라면 밝을 때에는 헤아려 살펴봄(見)이 사라져야하고 반드시 밝음과 하나라면 어두을 때는 사라져야 당연하며 사라졌다면 어떻게 밝음을 보고 어둠을 볼 수 있겠는냐? 만일 밝음과 어둠이 다르더라도 헤아려 살펴봄(見)이 나고 사라짐이 없다면 하나 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냐? 만일 이 헤아려 보는 마음(見精)이 어둠과 밝음과 더불어 한 몸이 아니라면 네가 밝음과 어둠,허공(虛空)을 떠나서 헤아려 살펴봄(見)의
맨 처음을 밝혀 보거라. 어떤 모양 이겠느냐?
밝음을 떠나고 어둠을 떠나고 허공(虛空)까지도 떠난다면 이 헤아려 살펴봄(見)이 거북이의 털.토끼의 뿔과 같이 말만 있고 실제는 없는 것과 같으리니 밝음,어둠,허공(虛空)의 세 가지 모습과 다르다면 무엇을 말미암아 헤아려 살펴봄(見)을 내세우겠느냐?밝음과 어둠이 서로 등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라고 하여 마음을 흐리게 하여 헤매게 하는 것이냐?밝음과 어둠 그리고 허공(虛空)을 떠나서는 본디 없는 것인데 어떻게 다르다고 하여 마음을 흐리게 하여 헤매게 하는 것이냐? 공(空)과 헤아려 살펴봄(見)을 나누는 경계선(境界線)이 없거늘 어떻게 같지 않다 하겠느냐? 어둠을 보고 밝음을 보아도 본바탕(性)이 바꿔지지 않는데 어떻게 다르지 않다 하겠느냐? 너는 다시 자세히 살펴보아라,아주 곰곰히 살펴보아라,아주 깊고 자세하게 곰곰히 따져보아라.밝음은 태양(太陽)을 말미암아 있고 어둠은 그믐을 따라 있고 통(通)함은 허공(虛空)에 매여 딸려있고 막힘은 대지(大地)에 의지하는 것과 같이 똑똑하고 분명하게 헤아려 보는 마음(견정)은 어느 곳에 비롯하여 나오는 것이냐? 헤아려 살펴봄(見)과 깨달음(覺)이라는 것이 하나는 공(空*覺)하고 하나는 어리석어서(見)서로 뭉쳐 어울릴 수 없으니 똑똑하고 분명하게 헤아리는 마음(見精)이 스스로 나오는 곳도 없이 스스로 생기지는 아니 했을 것이니라. 만일 보고 듣고 아는 그윽한 헤아려 살펴보는 것의 본바탕(見性)이 뚜렷하고 가득 차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지없고 움직임 없는 허공(虛空)과 움직이고 흔들리는 땅,물,불, 바람(地,水,火,風)이 함께 어울려 육대(六大)라 부르는지라 그 바탕(性)이 참되고 통하여 막히는 데가 없어서 다 여래장(如來藏)이므로 본디 나고 사라짐이 없느니라. 아난아,너의 참다운 모습(性)이 나고 죽는 고통의 바다에 빠져서 너의 보고 듣고 깨우치고 아는 이것이 본디 여래장(如來藏)인 줄을 깨닫지 못하나니
너는마땅히 보고 듣고 깨우치고 아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태어나느냐,사라지는냐,함께하느냐,달리하느냐,나고 사라짐이 아니더냐,함께하고 달리함이 아니더냐?네가 아직도 모르는구나.여래장(如來藏)중에 본바탕(性)이 모든 것을 헤아리는 것(識)인 보리(明知*菩提)와 본바탕이 반야(覺明*般若)인 깨달아 똑똑하고 분명하게 헤아리는 마음(覺精)인 헤아려 살펴보는 슬기(明見)가 맑고 깨끗하며 처음부터 그러하여(본연)모든 법계(法界*現象界-온누리)에 가득차서 중생들의 마음을 따르고 그들이 헤아리는 만큼만 어울려 함께 하는 것이니라. 하나의 헤아려 살펴보는 자리(見根)에서 온 세상(法界)을 두루 바라 보듯이 소리를 듣는 것(聽),냄새를 맡는 것(齅),맛의 앎(嘗觸)느끼어 앎,(覺觸),깨우쳐 앎의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덕(妙德)이 거울처럼 맑아서(瑩緣)온 세상(法界)에 가득 차고 모든 허공(虛空)에 두루 하거늘 어찌하여 오고 가는 곳이 따로 있겠는냐? 업(業)을 따라서 드러내는 것이거늘 세간(世間)의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인연으로 이루어졌다는니,처음부터 그런 모습(本然)이라느니 하며 헤매거늘 다 헤아려 아는 마음 (識心)으로 나뉘고 가리어(分別)헤아려 보는 것이라서 다만 말만 무성할 뿐이지 전혀 진실한 도리는 없느니라. 아난아 헤아림(識)의 바탕(性)이 근원(根源)이 없어서 여섯 가지의 근진(根塵*根-안,이,비,설신,의,塵-색,성,향,미,촉,법)을 비롯하여 헛되게 나온 것이니라.네가 지금 이 모임의 성스러운 무리들을 두루살펴보되 눈으로 차례 차례 둘러보나니 그 눈으로 둘러보는 것은 나누어 밝히는 것 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아서 너의 헤아림(識)이 순서대로 이는 문수,이는 부루나, 이는 목건련,이는 수보리, 이는 사리불이라 가르키는 것이리라.이 헤아림(識)으로 아는 것이 헤아려 살펴봄(見)에서 생기는 것이냐.모습(相)에서 생기는 것이냐,허공(虛空)비롯함이 없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냐?
아난아,너의 헤아림의 바탕(識性)이 만일 헤아려 살펴보는 것(見)으로 생긴다면 밝고 어둠 그리고 모습과 텅 빔(空)은 없는 거와 같으며 이 네 가지가 없으면 반드시 너의 헤아려 살펴봄(見)도 처음부터 없을것 이니라
오히려 헤아려 살펴보는 것의 본바탕(見性)이 없는데 무엇으로 헤아림(識)을 드러낸다는 것이냐? 만일 너의 헤아림의 본바탕(識性)이 모습(相)에서 생긴다면 헤아려 살펴보는 것(見)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이미 밝음도 보지 못해야 하고 어둠도 보지 못해야 할 것이고,밝음과 어둠에 매여 있지 않는 빛과 공(空)도 없을 것이니,저 모습이 없는데 오히려 헤아림(識)이 어떻게 드러낸다는 것이냐? 만일 공(空)에서 생긴다면 모습도 아니고 헤아려 살펴봄(見)도 아닐것이니라.헤아려 살펴보는 것(見)이 아니라면 나누어 가리는 것(분별)이 없어서 스스로 밝음과 어둠, 빛과 공(空)을 알지 못할 것이며 모습(相)이 아니면 얽매어진 것(緣)이 사라져서 보고 듣고 깨우치고 아는(見聞覺知)것을 편안하게 이루어질 곳이 없느니라. 헤아려 살펴보는 것(見)도 아니어서 텅 빔(空)이 라면 없는 것과 같을 것이고 있다하여도 물체(물체)와는 같지 않으리니 네가 헤아림(識)을 드러낸들 무엇을 분별하겠는냐? 만일 헤아림(識)이 비롯함이 없이 별안간 생긴다면 어찌하여 낮에는 밝은 달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네가 다시 주의 깊고 자세하게 아주 작은 것까지도 주의 깊고 자세하게 곰곰히 살펴라,헤아려 살펴봄(見)은 네 눈동자에 의지 하였고 모습(相)이란 눈앞에 이루어진 모양(相)이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모습이 아닌 것은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헤아림(識)의 얽어매어짐은 무엇을 비롯하여 나오는 것이냐?
헤아림(識)은 쉼 없이 움직이고 헤아려 살펴봄(見)은 언제나 맑고 잔잔해서 서로 어울리거나 뭉칠 수 없으므로 소리를 듣고 깨우쳐 아는 것도 역시 이러하여서 헤아림(識)이 얽어매어짐 없이 스스로 나올 수 는 없는 것이니라.만일 헤아려 아는 마음(識心)이 본디 의지할 데가 없어서 보고 듣고 깨우치고 아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는 두루 가득한 맑은 모습(湛然性)도 당연히 없다면 저 허공과 땅,물,불,바람(地水火風)과 더불어 칠대(七大*地,水,火,風,空,見,識)라 부르는 것도 의지할 곳이 없어야 하느니라.참다운 모습(性)이란 참되고 하나로 통하여 아무 구별이 없어서 (圓融)다 여래장(如來藏)이라 본디 나고 사라짐이 없는 것이니라.아난아,네 마음이 거칠어서 갈 곳 몰라 떠돌아다니느라 보고 듣는것(見聞)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아는 반야를 드러내는(發明)참된 여래장(如來藏)인 줄은 깨닫지를 못하니,너는 마땅히 이 여섯 곳의 헤아려 아는 마음(識心)을 살펴보아라.같으냐,다르냐, 비었는냐,존재하느냐,같지도 다르지도 않느냐,비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냐? 네가 아직도 모르는구나,여래장(如來藏)중에 본바탕(性)이 모든 것을 헤아려보는 것(識)인 보리(明知*菩提)와 본바탕이 반야(覺明*般若)인 참다운 헤아림(眞識)인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깨달음(妙覺)이 깨끗함 그대로 온 세상(法界*現象界)에 두루 하여서 모든 허공(虛空)을 머금고 드러내 보이나니,어찌 오고 가는 곳이 따로 있겠느냐? 업(業)을 따라서 드러내는 것이거늘 세간(世間)의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인연으로 이루어졌다느니,스스로 그런 모습(本然)이라느니 하며 헤매거늘 다 헤아려 아는 마음(識心)으로 분별하여 헤아려 보는 것이라서 다만 말만 무성할 뿐이지 전혀 진실한 도리는 없느니라.
15, 아난이 기뻐하다
이때 아난과 대중들이 부처님께서 이루 말할 수없이 자세(微妙)하게 밝히신 참다운 도리를 가르침 받고는 몸 마음이 자취가 사라져서 걸림이 없어지고 이리하여 모든 대중들이 마음이란 것이 온 누리에 둘 함을 알았고,온 누리의 공(空)을 보되 손에 가진 책(葉物*그 당시에는 페다리-Pattra-나무의 잎사귀에 글을 적었음
.야자수)을 보듯 하였고 온갖 세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다 보리(菩提)의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반야인 본마음(妙明元心)인줄 알았다.마음이 두루 하고 통하여 가득해서 온 누리를 머금고 다스려지는지라 부모님이 낳아준 몸을 돌이켜 살펴보니 마치 온누리의 허공(虛空)중에 하나의 미진(微震)이 바람에 흔들려 있는듯 없는 듯 하고, 큰 바다에 물거품 하나가 떠밀려 다니며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인연이 아님이 그러한 줄 알아서,본디 이루 말할 수 없이 빼어난 마음(妙心)은 언제나 머물러 사라지지 아니함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부처님께 예(禮)를 올리고 난 후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는 일찍이 없던 빼어난 참다운 도리를 얻은 기쁨에 부처님 앞에서 크나큰 은혜의 시를 읊어서 부처님을 기리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맑고 총지(摠持*眞言을 외어 모든 법을 가지다,잊지 아니하고 모두 기억하다)하시어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림 없으신 이 세상 제일 존귀한 분(世尊)이시여! 당신은 수능엄(首楞嚴)의 왕이시어 이 세상에 드물다네,억겁(億劫)동안 뒤바뀐 헛된 샐각 사라져 아승지(阿僧祗)안 흘러도 법신 얻게 되었다네.이제 원하나니 과위(果位)를 얻어서는 보왕(寶王)이 되어 갠지즈강의 모래만큼 많은 중생 건지리다.이후로는 지극한 정성 그마음으로 셀 수 없는 많은 사원 받들어 모시려네.이것만이"부처님께 은혜 갚는다"부르리라.
엎드려 원하옵나니 이 세상 제일 존귀한 분(世尊)이시여 밝히어 드러내 주시옵소서.오탁악세(五濁惡世)에 제일 먼저 들어가 저는 다짐하려 하나이다.한 사람만 성불(成佛)하지 아니하여도 열반에 들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무르려 하나이다. 위대하신 승리자의 크나크신 힘과 그 크신 사랑에 다시 바라나니 살피시어 모든 번뇌 사라지게 하시고 일찍이 첫째가는 빼어난 깨달음에 오르게 하사 온 세상 도량에 앉게 하여 주소서.공(空)의 참다운 모습(性)이야 다하여 사라질 지라도 법륜(法輪*차크라-cakra)을 굴리는 이 마음이야 변할 리 있으오리까? 제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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