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성적적(惺惺寂寂)
망심(妄心)을 일으키지 않는것이 선(禪)입니다.
그 자리에서 본성을 보는것이 정(定)입니다. 이것이 선정(禪定)입니다.
돈오(頓悟)는 단박에 깨치는 것입니다. 찰나에 무명을 다 끊어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돈오는 무념을 종(宗)으로, 청정을 체(體)로, 지혜를 용(用) 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무념, 무심은 어떤때, 어떤 장소에서도 일체 동요하지 않는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무념, 무심, 보리, 열반, 해탈, 견성, 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사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중도, 돈오라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또한 중도를 일컫습니다. --------------------▶중도 : 양극단을 여윈자리.즉 삶과죽음,고저,미추,장단등 2분논적인 자리를 여윈 자리
특히 선가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합니다. 일체 것을 다 부정합니다.
텅비어 비어있다는 그 자체마저 없습니다. 그래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반경〉‘금강신품’에 ‘이 마음자리는 밝고 밝아서 아는것도 없고 알지 못할것도 없다’ 고 합니다.
참선수행을 할때,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寂寂)에서 멍함(昏沈.혼침)에 빠지지 말고 (편안함에 머무르지 않음),
항상 또렷하게 깨어 있어 산란함(掉擧;도거)에도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지(止;定,사마타수행)와 관(觀;慧,위빠사나수행)을 함께 닦으라는 것이므로,
성성 (惺惺) 은 慧 (觀照;관조;사방으로 비추어 보는 것) 에 해당되며, 적적(寂寂)은 止(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함)에 해당 됩니다.
진공은 적적이며, 묘유는 성성입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空은 우리들의 눈으로 볼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빛(因)이 프리즘(緣)을 통과하면 7색의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果)과 같아서,
空(허공)의 무한한 가능성(因)은 어떠한 상황(緣;조건)을 만나면 물질을 만들어 냅니다(果).
이것을 인연법(因緣法), 연기법(緣起法;만물은 서로 얽혀서 생긴다.)이라하고,
전체적으로는, 因(원인;씨앗)이 조건(緣)을 만나면 무엇을 만들어 내고(起), 만들어 진 것(果)은 업(業)으로서 남게되며,
業은 다시 새로운 因과 緣을 만들게 되어 또 다른 業을 남기는 것을 끊임없이 되풀이(윤회;輪廻) 하게되고,
因과 緣과 業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물(인드라의 網) 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중중무진(重重無塵)의 상관관계로서 서로 얽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진공묘유는 있음(有)에서 없음(無)을 보고, 없음(無)에서 있음(有)을 보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장작에서 재를 보고, 재에서 장작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질량(물체;色)과 에너지(형상이 없는 것;空) 등가성이론 으로도 증명된 사실 입니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우주에 가득한 허공은 일정한 굴곡을 가지고 있어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는것도 이 모양을 따라서 돌고 있다는 것을 밝혔으며,
허공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곳(Black Hole)이 우주 곳곳에 산재해 있어 그곳에 빠지면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최초의 우주의 탄생도, 150억년전에 허공(아무 것도 존재 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우주)이 10의 마이너스 33승cm의 크기로 축소 되었다가
대폭발(Big Bang)을 일으켜 확장 되면서 만물이 생겨나고,
현재도 은하계에서는 끊임없이 폭발을 일으켜 새로운 은하계가 만들어 지고 있으며, 우주는 지금도 계속 팽창 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주는 허공의 폭발이라는 인(因)이 연(緣)을 만나서 없어 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는 것을 반복(윤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로 가져와서 살펴 보면,
현재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공묘유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공묘유와 성성적적'을 마음으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진공은 묘하게 존재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듯이, 성성적적한 마음이란? 마음이 일어 나지 않은 마음이 아니라,
번뇌, 망상(妄念:無明)이 일어나지 않음이 적적이고, 적적한 상태에서 청정(淸淨)한 마음이 일어남을 말하므로, 아무 마음이 없는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적적하게 만드는 것도 우리의 의식의 작용이며, 성성하게 하는 것도 의식이 하는 것입니다.
다만 청정심(本性;본래의 마음)도 일어난 마음 이기는 하나 어디에도 물들지 않으며,
걸림이 없으므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은 `부처는 중생과 똑같이 행하여도 행함이 없다'고 하는것과 같은 말입니다.
참선 할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또 다른 번뇌가 되어, 수행은 점점 더 멀어지고 맙니다.
번뇌, 망상은 내가 과거 전생으로 부터 지금까지 익혀온 모든 알음알이(지식,습관;고정관념;내 생각;業) 입니다.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는 것은 바로 내 생각(아상,我相)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착각하여 아무런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것에만 집착하게 되어 망념은 점점 더 일어나고 맙니다.
아무런 생각이 일어 나지 않으면 그 것은 죽은 사람 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삼매(三昧;禪定) 속에서는 깨달음을 얻을수 없고,
성성적적한 삼매의 마음이 생활화 되어 끊어지지 않은 상태(삼매관성)인,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因)에서 어떠한 바깥 경계(대상;緣)에 부딪 힐때에 문득 깨치게 됩니다(果).
그래서 돈오(頓悟)라 합니다.
이와같이 오매일여의 경지 까지는 내가 만들어야 시절인연(時節因緣;알맞은 때)이 되면 깨치게 되므로 자업자득인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나면, 저절로 본래의 성품인 진여심(眞如心;佛心)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때에 일어나는 마음(생각)은 내 생각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반야의 지혜(般若智慧;반야바라밀,지혜의 완성)이며,
이것을 가리켜서 불법(佛法)의 대의(大意)를 체득(體得)하였다고 하고,
체득한 반야의 지혜로서, 지금, 여기에서, 나의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 가는것이 참된 수행이며,
이때에 실천하는 삶은 業을 남기지 않으므로 더이상 윤회는 없어지게 되며,
대 자유인이 되어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법신(法身;부처)이 되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의 중생심이나, 청정한 불심(佛心)이나 모두가 한마음(一心) 입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중생심인 심생멸문(心生滅門;不覺)과 불심인 심진여문(心眞如門;覺)은 각기 다른 마음이 아니라 한마음 이라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는 시작과 끝이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므로 어떠한 분별심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원래 부처인데 그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듯이, 모든 것은 자아의식에 의한 허상입니다.
마치 자기 호주머니에 칠보(七寶)로 가득한 사실을 모르면, 가난하게 살것이며,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가난을 벗어 나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를 �아서 구도(求道)의 길을 떠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해서 부자가 되고서도 그것이 모든 만족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본래 모든 것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가 다 갖추어진 모습 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성적적한 마음은 의식(제6식), 자아의식(제7말나식)인 망념(무명)에 가리워져 작용되지 못하고 있는
아뢰야식(제8식)에 있는 불성의 씨앗(여래장.如來藏)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우리의 모든 것을 저장(감추고 있는) 하고 있는 제8식(識;마음)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우주의 모든 역사를 다 갖추고 있기에 우리의 몸을 소우주 라고 합니다.
우주 법계의 모든 것은 바로 `아뢰야식(마음)' 입니다. (펌)
고통(苦)은 본래 없는 것이나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를 苦라 하나, 이것은 순환(巡還;無常)의 과정일 뿐, 내가 있다(有我)고 생각하면 고통도 있는 것이고,
없다(無我)고 생각하면, 고통은 없습니다.
낙엽이 지고 새싹이 나는 것이나,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인간의 생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본래 죽지 않음을 모르고(不生不滅), 죽지 않으려 하니 그것이 고통 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자기가 원하는 일들이 잘 안풀리는것은 세세생생 쌓아왔던 번뇌망상이라는 업장이 쌓여서 입니다
우리가 매일 수행을 한다는것은 이 업장을 녹이는 작업 입니다
수행의 방법은 제가 일전에 여기 올려드렸던 바와 같이 참선,염불,간경,주력 4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만
이중 제 개인적으로는 염불이 가장 수월하고 쉽기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권했던 것입니다
참선과 염불을 하든 간경을하든 주력을 하든 각자의 근기에 맞게 해야할 것이오나 이 4가지를 실행 할때에 반드시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모든 수행법은 결국은 삼매에 드는것이 목적 입니다
삼매라 하니 머 거창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앉으나 누우나 걸으나 서나...모든 행동시)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로 오직 부처님만 관하시면 됩니다
왜냐면 우린 모두 무아이며 부처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할때 본래 그자리로 돌려 놓아야 함이없는 마음으로 오직 그일만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라는 아상이 사라지며 모든일은 부처님이 하시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등산을 할때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면서 염불 하면서 등산을 한다고 가정 한다면 그게 바로 등산선 이자 등산 삼매에 들어가 있는 것이며
독서를 할때는 독서선, 일을 할때는 일선, 운전을 할때는 운전선.. 즉 운전삼매가 되는것 입니다
물론 화두를 들고 선정에 드는 간화선 수행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지도하는 스승스님을 모시고 해야 올바로 나아갈수 있기때문에
바쁜 현대인들이 하기에는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해가며 오직 인연따라 윤회만 되풀이 합니다
우주 자연도 역시나 이 법칙에 의해 생멸이 반복 되겠지요
몸은 세로운 음식물과 물,공기,기타 모든것이 인과 연으로 되어 먹고 마시고 또한 배출 하면서 윤회하며
마음도 수없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면서 윤회하며 돌아갑니다
우리가 세세생생 쌓았던 번뇌망상이란 업장은 어느한순간 마음 먹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번뇌망상이 생기는것을 없엘려고 고생하지 말고 그냥 놓아버리는 연습(방하착)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집착을 놓고 그 번뇌망상의 자리에다 끊임없이 염불이나 기도를 하면서 삼매에 들어감으로 해서
중생에서 부처의 삶 (성불) 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마치 업장이 마른장작 쌓아있듯히 한량없이 있드라도 염불과 삼매를 통해 단 일순간에 모두 태워 없에 버리듯이
매순간 부처장 그세계에 되돌려 놓아야만 녹일수 있습니다
그렇게 놓아버리고 비움으로 해서 법계의 한량없는 수승한 복을 받으실수 있는
텅빈 복주머니(육신)를 비워놓는 작업을 하시기 바랍니다
복은 비워야 들어오는 것입니다
'붓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심명 (0) | 2017.05.23 |
---|---|
천지팔양신주경을 알다.. (0) | 2017.05.10 |
마음 (0) | 2016.05.26 |
불교에 관한 약간의 오해 (0) | 2015.10.09 |
숫타니파타( 알라바카 야차) (0) | 2015.05.26 |